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히로타 고키 (문단 편집) === 외교관과 정치인 시절 === 1906년 [[도쿄제국대학]] 졸업 후 외무성에 합격해 외교관 생활을 시작했다. 그때 그와 같이 들어간 동기가 [[요시다 시게루]]다. 1907년 베이징 [[영사관]]보를 시작으로 영국, 미국, 소련 등으로 부임하며 경력을 쌓았다. 대부분의 외교관들이 그러하듯 그도 [[시데하라 기주로]]의 협조외교론을 지지했고 한때는 '''시데하라 외교론의 중추'''로 불릴 정도로 신봉했었다. 1933년 [[사이토 마코토]] 내각(1932-1934)의 외무대신을 시작으로 [[오카다 게이스케]] 내각(1934-1936)에서도 계속 외무대신을 맡았다. 1934년 당시 [[램지 맥도널드]] 내각에서 재무상으로 재임하고 있던 [[네빌 체임벌린]]과 접촉해 [[워싱턴 해군 군축조약]]으로 인해 종료된 [[영일동맹]]을 대체하는 영일불가침조약을 새로 체결하려 했지만, 영국 총리 램지 맥도널드는 이 조약이 미국에게 영일동맹의 재림으로 보일까 우려했고, 일본 역시 동아시아에서 영국의 이권을 보장해줄 의지가 없었고 결정적으로 [[런던 해군 군축조약]] 탈퇴 통보를 하면서 무산되었다. 1935년, 군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중일관계를 대사급으로 격상시키는 등 성과가 없진 않았으나 관동군이 미쳐 날뛰는 것을 막지 못해 [[하매 협정]], [[진토 협정]] 등이 정부의 승인 없이 체결되는 데도 이를 묵인했고 11월에는 [[기동사변]]이 일어나기도 했다. 10월 4일, 내각회의를 통해 [[히로타 3원칙]]을 결정, 중국에 만주국 승인을 대가로 불평등조약의 폐지, 공동방공, 무력외교 금지 등을 제안했지만 중국에서 거부하였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